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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현대 이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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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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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국립 고등교육 기관인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 신라의 국학, 고려 때의 국자감 혹은 성균관 등으로 부르던 것을 계승하여, 1398년에 건물을 준공하여 유학 교육을 실시하였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에 걸쳐 통용된 이름이었으며, 그 밖에도 국학·태학·국자감·반궁(泮宮)·현관(賢關)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균관에는 문묘와 명륜당을 주요 건물로 하고 그 밖의 부속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문묘는 대성전(大成殿)과 동무(東 )·서무(西 )로 되어 있고 대성전에는 공자 외 제현(諸賢)을 모시었다. 명륜당은 문묘의 뒤에 있으며 그 좌우 양측에는 동·서 양재(兩齋)가 있어 유생들이 기숙하게 되어 있다.
이밖에 지금의 도서관에 해당하는 존경각(尊經閣), 공자·맹자·안자·증자·자사(子思) 등의 아버지를 제사하는 계성사(啓聖祠)와 그 외에 비천당(丕闡堂)·일양재(一兩齋)·벽입재(闢入齋)·육일각(六一閣)·정록청(正錄廳)·서리청(書吏廳)·경관청(京官廳)·향청(香廳)·전사청(典祀廳)·낙생청(樂生廳)·수복청(守僕廳)·제기고(祭器庫)·차장고(遮帳庫)·직방(直房)·포주(包廚)·식당·서벽고(西壁庫)·문고(文庫)·동서월랑(東西月廊) 등의 부속 건물로 되어 있다.

성균관을 유지, 경영하는 비용은 나라에서 하사하는 학전(學田)과 어장(漁場) 등으로 충당하였다.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 임용하였는데, 동지사(同知事) 이상은 다른 관청의 관원이 겸임하였고, 장격(長格)인 지사(知事, 정2품) 1인, 동지사(종2품) 2인, 대사성(정3품) 1인, 사성(종3품) 2인, 사예(정4품) 3인, 직강(정5품) 4인, 전적(정6품) 13인, 박사(정7품) 3인, 학정(정8품) 3인, 학록(정9품) 3인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직제는 고종때까지 거의 변동없이 계속되었다. 입학 자격은 일정한 신분적 요건을 갖추도록 했는데 생원·진사를 원칙으로 하며, 생원·진사가 부족할 경우에는 사학의 학생으로서《소학》과 사서와 1경에 통한 자, 일찍이 문과나 생진과의 향시나 한성시(漢城試)에 합격한 자, 나라에 공로가 있는 집 적자손(嫡子孫)으로《소학》에 통한 자, 현재 관리로 있는 자로서 취학을 희망하는 자 등으로 충원할 수 있었다. 학생 정원은 조선 초에는 1백인이었다가 그 뒤 150인에서 2백인으로 충당할 수 있도록《경국대전》에 기록되어 있으며, 농사의 흉풍에 따라 감원과 충원이 좌우되었다. 교육 내용을 살펴보면 경술(經術)과 문예를 주로 하여 강독·제술·서법으로 나눈다.

1) 강독은 사서인《논어》·《맹자》·《중용》·《대학》과 오경인《시전》·《서전》·《주역》·《예기》·《춘추》를 9재로 편성하고, 《대학》에서부터 《주역》까지를 순차적으로 학습하게 하였다.

2) 저술은 의(疑)·논(論)·부(賦)·표(表)·송(頌)·잠(箴)·기(記)를 일정한 기간 동안 힘쓰게 하여 지식의 응용과 표현을 연습시켰다.

3) 서법은 해서·행서·초서를 단계적으로 반복 연습하되 해서를 장려하였다.

성균관의 면학은 매일 강을 받았으며 고시(考試)가 다양하고 철저하여, 일고(日考)·순고(旬考)·월고(月考)·연고(年考)가 있었다. 연고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실시하여 시험관은 성균관 당상급 예조당상 2인, 예문당상 1인, 대간 1인이 모여서 고강(考講)하였다.

성균관 유생의 자치활동으로는 장의(掌議)와 색장(色掌) 등의 대표를 선출하여 조직적인 학생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공관(空館)·권당(捲堂)·공재(空齋) 등을 통하여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키기도 하였다.

이들 거재유생(居齋儒生)들은 국가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明倫)·풍교(風敎)에 어떤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인정될 때는 이를 상소하여 탄핵하였다. 이것을 유소(儒疏)라고 하는데, 이때는 관생들이 명륜당에 모여 사무를 분장하고 상소두(上疏頭)·소색(疏色)·제소사소반(製疏寫疏反)·별색장(別色掌) 등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소두는 관생들을 이끌고 관에 나아가 부복하여 상소하게 되는데, 이때 상소의 윤허를 받지 못하거나 소두를 벌주어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함)를 받게 되든지 귀양을 보내게 되면, 학생들은 권당·공재·공관 등을 취하였다. 권당은 식당에 들어가지 앉는 것으로 단식동맹을 뜻하며, 공재는 기숙사에서 나가는 것이고, 공관은 학생 전부가 대성전 신문밖에 이르러 4배하고 퇴거하는 것이니 지금의 동맹휴학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이 되면 왕은 근신을 보내어 교유(敎諭)를 내리는 등 무마에 힘쓰게 되어 마치 민주국가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것을 통하여 볼 때, 학자를 우대하고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였던 당시의 풍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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